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서울의 새로운 중심가로 부상하던 서초구 서초동의 한 언덕에서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폭풍처럼 치솟은 먼지바람을 타고 인근 법조타운까지 희뿌연 먼지로 휩싸였고, 놀란 시민들은 앞다퉈 아이들을 데리고 집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것은 건국 이래 최악의 참사라고 불리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의 시작이었다.
◇ '붕괴 알리지 마라'…몰래 도망친 경영진
1987년 착공해 1989년 개장한 삼풍백화점은 당시 단일 매장 기준으로 전국 2위 규모의 초대형 백화점이었다.
고급 명품과 수입품을 주로 진열해 강남 부유층을 끌어모으면서 매출액 기준 업계 1위 자리로 오른 이 백화점의 이면에는 안전 불감증과 금전만능주의의 추악한 모습이 감춰져 있었다.
2003년 숨진 이준 전 삼풍건설산업 회장은 애초 삼풍아파트에 딸린 4층 근린상가로 설계된 건물에 무단으로 한 층을 더 올렸고, 물건을 더 많이 진열할 생각에 일부 기둥을 제거했다.
나머지 기둥도 굵기를 25%나 줄였기에 불법증축으로 늘어난 하중을 이기지 못한 건물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전 회장은 건물 곳곳에 금이 가 붕괴가 명확해진 시점에서도 매출에 지장을 줄까 봐 대피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 고객들을 버리고 몰래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준석 선장과 승무원들이 '가만있으라'는 방송만 틀어놓고 승객들을 내버린 채 도망친 세월호 침몰 참사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삼풍백화점은 불과 20초 만에 지상 5층부터 지하 4층까지 무너져 내렸고, 백화점 안에 있던 1천500여명의 고객과 종업원은 그대로 건물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 출동했던 소방관과 수사당국 관계자들은 "멀쩡한 줄만 알았던 건물이 너무 심각하게 붕괴해 북한 공작원의 테러인 줄 알았다"고 입을 모았다.
◇ 생과 사, 순간에 희비 엇갈린 사람들
서울 강남소방서 소속으로 일찍 사고현장에 도착한 소방관 중 한 명이었던 현철호 수서119안전센터 진압대장은 "엄청난 먼지 때문에 사물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참사 현장은 거대한 콘크리트를 그냥 쌓아놓은 듯 보였는데 5층 건물이 무너진 게 어떻게 저 정도밖에 안 되냐는 느낌이 들었다"고 당시를 되새겼다.
건물 주변에는 피를 흘리는 부상자가 넘쳐났고 이중 상당수는 사지 중 일부를 잃은 중상자들이었다.
김미호 당산119안전센터 진압대장은 "완전 전쟁터였다"고 말했다.
아비규환의 참상 속에서 구조대원들은 콘크리트 더미에 산 채로 묻힌 생존자들을 구해내려 발버둥쳤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철호 대장은 "연세가 높으신 환경미화원 24명이 요행히 지하 3층의 무너지지 않은 공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구조작업을 하던 중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2차 붕괴가 일어났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처음에는 서서 작업하던 구조대원들은 2차 붕괴 이후로는 무릎을 꿇은 채 철근을 끊고 길을 막은 콘크리트를 부숴가며 구조작업을 해야 했다. 다행히 더 이상의 붕괴는 없었고 환경미화원들은 모두 무사히 구조됐다.
지하 주차장에 있던 차량 휘발유에서 불붙은 화재 진화과정에서 뿌려진 물이 안타깝게도 매몰자들의 생사를 가르기도 했다.
소방수는 화재로 인한 고열과 연기를 잠재워 생존자들을 질식하지 않도록 지켜줬고 식수로도 기능을 했지만, 일부 매몰자는 고인 물에 잠겨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상황도 발생했다.
당시 출동했던 소방관 상당수는 여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
현 대장은 "아직도 악몽을 꾼다고 하는 직원이 꽤 많다"면서 "당시는 체계가 잡히지 않았고 인원도 부족해 나는 2교대 근무를 하면서 한 달 반이 넘도록 현장을 떠나지 못했고,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를 병원에 남겨둔 채 이같은 사투를 벌여야 했다.
현장에서는 유족이나 자원봉사자를 빙자해 잔해 속에 있던 상품을 훔치거나 사망자의 옷에서 지갑 등을 빼내가는 인간들의 추한 민 낯도 드러났다. 이중 일부는 구속돼 처벌을 받았다.
◇ 20년이 지났지만…, 잊혀버린 교훈들
이 참사는 결국 인재(人災)였다.
당시 서울지검 형사1부장으로 재직하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수사 실무를 맡았던 법무법인 동북아 이경재 대표 변호사는 "삼풍백화점 붕괴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지변이 아니라 건국 이후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농축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지나면서 북한의 테러 등 도발 위협이 상당히 있었기에 공안적 요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폭발이나 고의적인 파괴는 없다는 것이 수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강남권의 최신, 최고급 백화점이었던 삼풍백화점은 대들보가 따로 없이 기둥만으로 지붕판을 받치는 무량판(無梁板) 공법으로 시공됐는데 기둥과 지붕판 두께를 줄이는 등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시공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특히 불법증축된 5층 식당가에 건물 수개층 무게의 온돌판이 깔리고, 옥상에는 냉각수가 채워지면 무게가 무려 87t에 달하는 에어컨 냉각기까지 올려졌다.
이 변호사는 "문짝이 안 맞거나 벽면 등의 휨 현상이 드러나거나 균열이 발견돼 소방당국으로부터 지적을 많이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며 "특히 붕괴 전날 오전에 찍힌 사진을 보면 육안으로도 당장 사용 정지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고 되새겼다.
그럼에도 이 전 회장을 비롯한 백화점 경영진은 이와 관련한 대책회의까지 열고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참사가 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이 변호사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들을 이야기할 때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는 "가장 전문적이어야 할 업종이 극히 비전문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공간이 오히려 사람을 해치게 됐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이듬해 이 전 회장에게 7년6개월의 실형을 확정했고 그는 만기출소 후 얼마 되지 않아 숨졌다. 일각에서는 그를 살인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미필적 고의를 입증할 수 없었던 탓에 업무상 과실치사죄에 따른 법정 최고형량이 선고됐다.
502명의 목숨을 앗아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2013년 4월 방글라데시 라나플라자 붕괴사고(1천129명 사망)가 발생할 때까지 18년간 건물 붕괴로 인한 사망자수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지금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선 옛 삼풍백화점 부지 주변에선 참사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삼풍참사위령탑은 세인의 눈을 피하고 싶기라도 한 듯 현장에서 4㎞ 떨어진 양재시민의숲 한쪽에 마련됐다.
찾는 이가 많지 않은 위령탑은 삼풍백화점 사고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지난해 세월호 침몰이란 또 다른 참사를 맞이한 우리 사회의 초라한 자화상으로 읽힌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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