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최동원 페북>
'무쇠팔 투수' 최동원(崔東原·1958∼2011)은 잊지 못할 여러 장면을 야구팬들에게 선사했다. 우선 경남고 2학년 때인 1975년 9월17일 우수고교초청대회 당시 고교 최강 경북고를 노히트노런으로 막아낸 장면. 그는 이미 그때부터 '초고교급 투수'로 불렸다.
다음은 1970년대말 한미 대학 친선 야구대회에서 강속구와 느린 커브를 섞어 던지며 미국 타자들을 농락한 장면. 시속 100㎞도 안 될 것 같은 느린 공은 시속 150㎞대 강속구와 비교되며 '아리랑 볼'로 불렸다. 프로야구 시절에도 홈런을 맞고 나면 다음 타자에게 쳐보라는 듯 아리랑 볼을 던지곤 했다.
박찬호에 앞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뻔하기도 했다. 1981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받고 난 뒤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했지만, 병역 문제로 좌절된 것.
1983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최동원 1984년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정규리그 27승13패6세이브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7전4선승제)에서는 1,3,5,6,7차전에 등판해 4승1패를 거두며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혼자서 4승을 올린 투수는 최동원뿐이다.
'국보급 투수' 선동열과의 맞대결도 화제였다. 1986년 4월 첫 대결은 선동렬의 1-0 승리. 4개월 뒤 두 번째 대결에선 최동원이 2-0 완봉승을 거뒀다. 1승1패로 맞이한 1987년 5월16일의 마지막 대결에서 두 투수는 15회까지 완투하며 2-2 무승부 경기를 펼쳤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 명승부로 꼽히는 장면이다.
타자를 압도하는 승부 근성과 눈부신 연투 능력으로 '무쇠팔'이라는 별칭을 얻은 최동원이 불과 5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11년 9월14일 새벽 최동원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구단은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