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별만들기이엔티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해온 이들에게는 베끼거나 흉내낼 수 없는 내공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MBC TV 주말극 '여자를 울려'를 마치고 1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김정은에게도 어디인지 모르게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1996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지 20년. 통통 튀고 사랑스러운 여성을 주로 연기했던 김정은도 어느새 40대에 들어섰다.
그 나이대의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한정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때 '로코퀸'이었던 김정은은 3년여의 공백 끝에 누구보다 과감하게 엄마, 그것도 아들을 잃은 엄마 역으로 복귀했다.
"20년 동안 연기한 비결이요? 그냥 눈 딱 감고 살아남으려고 버텼어요. 내 걸 버리면서도 지켜내면서 휩쓸리지 않아야 하는데 솔직히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이쯤되면 이제 시청자분들은 캐릭터 뿐 아니라 저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잖아요. 그게 부담이고 공포였어요.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그런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솔직함이었다고 김정은은 털어놨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빨리 인정을 하는 타입"이라고 입을 뗀 김정은은 "솔직하게 다가가면 어려워보였던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극중 전직 형사이자 엄마인 정덕인은 화려한 액션으로 불량 학생들을 혼내준다. 공중을 도는 것은 물론이요, 오버헤드킥 같은 고난도의 발차기도 선보인다.
김정은은 "액션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한 것 같다"며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것 같다"며 호탕하게 웃어보이기도 했다.
주로 미니시리즈에 출연했던 김정은은 '여자를 울려'의 40부작 강행군에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친 모습이었다.
"저는 주로 단거리 선수로 뛰었잖아요. 나름의 리듬이 있어서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쯤 되면 극이 마무리돼가는 상황이었는데, 이번엔 체력은 다 됐는데 극은 중반까지밖에 안 온거에요. 정말 힘들었어요. 단거리 선수가 이번엔 마라톤을 뛰었네요."
미혼으로서 모성애를 표현하는 일만으로도 쉽지 않았을텐데 사랑하는 남자 강진우(송창의 분)의 아들 윤서가 아들의 죽음에 얽혀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극심한 고민에 빠지는 감정적인 연기까지 선보여야 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촬영하러 갈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는 김정은은 "아들을 죽인 게 윤서라는 걸 알고 오열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대사를 하는지 스스로 모를 정도로 정신을 놓아버렸다"며 "촬영이 끝나고 나면 언제 들었는지도 모를 멍이 많이도 들어있었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기대하는 수준이 있는데 괜히 정신을 놨다가 시청자들이 '에이 이상해' 하면 큰 일이잖아요. 그래서 부담이 더 컸어요. 안 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었죠. 그런데 감독님이 다가와서 '네 뒤에는 엄마들이 있다. 지금 니가 뭘 어떻게 하든 엄마들은 네 편'이라고 말해줬는데 그게 많은 힘이 된 것 같아요."
초반부터 강렬하게 극을 이끈 김정은은 극이 흐지부지 끝났다는 일부의 평가에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저부터 반성하겠다. 제 작품 중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작품들이 꽤 있어서 제작진을 만날 때마다 그런 걱정을 이야기했는데 잘 안 됐다"며 "제작환경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있고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드라마 촬영 중 열애 사실을 공개하게 된 김정은은 "솔직히 말하면 너무 창피했다"며 부끄러워했다.
인터뷰 내내 시원시원하던 목소리가 조금은 쑥스러운 듯 잦아들었다.
"기사에 '금요일마다 만났다'고 되어있어서 금요일만 되면 스태프가 다 같이 '금요일인데 누나 얼른 가시게 빨리 마쳐야 된다'고 놀려대서 진짜 창피했어요. 하지만 드라마가 정신적으로 소모되는 부분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남자친구가) 많은 힘이 됐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처럼 우직하게 있어주는 사람이 있는 게 참 든든하고 좋네요. 결혼이요? 이놈의 드라마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