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질서를 근본이념으로 삼은 조선 사회는 국가 차원에서 여성들에게 '열녀'(烈女)가 되기를 장려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지조를 지키고자 따라 죽은 여성의 집안에는 국가에서 표창과 함께 세제혜택까지 줬다. 자연히 이런 여성들을 기린 '열녀전'(烈女傳)도 숱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남성 문사들이 기록한 열녀전은 그런 여성들을 성리학적 이상향에 맞춰 미화했을 뿐 정작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들려주지 않았다. 남편이 위독하면 자신의 살을 베어 피를 내고, 남편이 죽으면 당연한 듯 따라 죽는 여성상은 남성 중심 지배질서에서는 아름다워 보였을 테다. 그러나 거기에 막상 여성 자신은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이런 글은 매우 특이하다. 18세기 후반 서울에 산 무반 집안의 딸 풍양 조씨(豊壤趙氏, 1772~1815)가 남긴 자전적 기록 '자기록'의 한 대목이다.
'내 비록 죽어 따르지는 못하나 생혈로 행여나 목숨을 늘리는 힘이 있을까 하여 급히 두어 걸음을 물러나 돌아서서 감추었던 칼을 빼 왼쪽 팔목을 급히 찔렀으나 마음이 황황하고 손이 떨려 능히 꿰뚫지 못했다. 다시 찌르려는데 아버지가 급히 칼을 빼앗고 시할아버지가 이끌어 합내로 나오게 하셔 말씀을 더듬으며 망령됨을 꾸짖으시고 비녀까지 빼서 시비에게 업혀 침소로 들여보내셨다.'
남편이 위독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열녀로서 도를 다하겠다며 칼로 몸을 찔러 피를 내려다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이다. 통상 열녀전과 같은 기록에서 묘사된, 다소 비현실적으로까지 보이는 '의연한 열녀'와는 사뭇 다른 인간상이 드러난다.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풍양 조씨는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했다가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만류에 마음을 바꾼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을 남긴다.
'내 생목숨을 끊어 여러 곳에 불효를 하는 것과 참담한 정경을 생각하니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모진 목숨을 기꺼이 받아들일지언정 다시 양가 부모님에게 참혹한 슬픔을 더하랴 하여 금석같이 굳게 정하였던 마음을 문득 고쳐 스스로 살기를 정하였다. 허나 늘 곡진한 마음과 도타운 정으로 대하던 지우(知友)를 생각하니 망연히 저버리고 홀로 살기를 탐하는 듯하여 떳떳하지 못한 내 마음과 불쌍하고 원망스러운 남편 생각에 간담이 미어지고 애 스러지는 듯하였다.'
풍양 조씨의 '자기록'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오랫동안 보관됐다가 10여년 전 고전연구자 박옥주가 처음 세상에 알렸다. 200자 원고지 약 500장 분량의 한글로 쓴 책으로, 여성의 자기 기록으로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남긴 '한중록'(閑中錄)에 비견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담은 애도문학일 뿐 아니라 아들을 낳고자 거듭된 임신과 출산으로 일찍 세상을 뜬 어머니, 과거 급제의 부담에 시달린 남편, 한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남편과 아내, 남편과 시어머니, 시어머니와 며느리, 친정과 시집의 관계 등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현대 한국어로 옮겨지지 않아 발견 이후에도 실체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자기록'이 고전문학자 김경미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HK교수의 손으로 옮겨 최근 '여자, 글로 말하다 - 자기록'(나의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김 교수는 "풍양 조씨는 유교적 삶의 태도를 갖고 있었지만 자신이 겪은 일을 하나하나 그 원인을 규명하듯 써내려갔을 뿐 이를 유교적으로 해석하거나 미화하려 하지 않았다"며 "'자기록'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풍양 조씨의 태도는 유교적 삶의 지향을 드러내면서도 그 모순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고 썼다.
280쪽. 1만4천800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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